여러 대기업 프로젝트에 을・병・정으로 참여한 경험이 이제는 제법 된다. 여러 기업과 일한 경험들이 쌓이니 자연스럽게 그룹 혹은 기업에 대한 캐릭터가 생겨났다. 다분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댄, 주관적인 느낌의 캐릭터다. 주로는 일하는 방식, 혹은 '갑과 을'의 관계, 태도에 관한 것이지만 예를 들자면 이런 느낌.
A그룹: 나는 갑, 너는 을. 까라면 까. 비용도 이만하면 괜찮잖아.
B그룹: 누구도 결정을 내려주지 않는다. 민주적으로 무능한 그들.
C그룹: 죄송하면서 등골 빼먹는 스타일.
D그룹: 수정의 무한 루프. 마감만이 나를 구원하리니.
E그룹: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내 마음을 알아서 맞춰보거라.
써놓고 보니 억울한 경험에 가중치가 너무 많이 반영되긴 했다. 이런 것을 '브랜드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기업 담당자들의 태도, 회의할 때의 분위기, 의사결정 과정 등을 종합해서 일종의 '캐릭터'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법적으로 인격이 인정되는 '법인'이니 당연한 일인가.
그런데 대부분 기업에서 내는 메시지에서는 캐릭터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식적인 메시지는 대개 딱딱한 경어체일 때가 많고, 드라마 <대행사>에서 나왔던 것처럼 '개 풀 뜯어먹는 거대 담론'을 전하는 추상적인 표현이 대부분이어서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우리가 친밀함과 흥미, 매력을 느끼는 것은 무채색 기업보다는 총천연색 캐릭터다. (캐릭터에 따라서는 무채색이 어울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리고 캐릭터는 당연하게도 나름의 생각과 목적, 행동 방식, 말하는 톤과 인상 등을 가지고 있다. 이를 기업에 대입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 = 기업의 비전, 높디 높은 목표, 의사결정 방식
목적 = 사명감을 가지고 기업이 수행하는 미션
행동 방식 = 사업 운영 기조나 방식, 구성원들의 행동이나 태도
말하는 톤 = 메시지의 톤 앤 매너
인상 = BI, CI, 웹사이트, UX 등 시각요소
수십에서 때로는 수만 명의 구성원을 가진 기업이 어떻게 하나의 캐릭터처럼 통합적인 태도나 메시지를 발신하게 할 것인가는 몹시도 어려운 문제다. 당연히 내가 한두 마디로 끼적여 될 문제도 아니고 하니, 이 부분은 패스.
다만, 내가 기업 고객님들께 글과 영상을 비롯한 기타 등등의 서비스를 파는 과정,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인터뷰를 도구로' 삼고 있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가장 앞단계에서 인터뷰를 진행한다. 거창하게 형식을 갖춘 인터뷰일 필요는 없고, 기업의 담당자를 비롯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정도여도 괜찮다. 이런 인터뷰 혹은 미팅은 희미하게나마 그 기업의 캐릭터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과정이다. 농도와 밀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업마다 고유의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고객님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기업 캐릭터를 파악하려고 하는 이유는 캐릭터에 맞는 톤 앤 매너로 메시지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치를 세우고 공격적으로 시장 진입을 하려는 스타트업이라면 50대 부장님 같은 말투와 내용의 메시지를 작성해선 안 된다. 오랜 역사가 있는 기업이라면 그 과정에서 축적한 전문가다운 태도가 기업이 내는 메시지에서도 느껴져야 한다.
F기업의 브랜드 필름 기획 프로젝트가 있었다. 경영자가 바뀌면서 브랜드 리뉴얼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기술기업으로 도전적인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성과가 가시화되려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다.
이쯤에서 캐릭터를 한 번 떠올려보자. 이 기업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기술기업이니까 공대를 졸업했을 것으로 여겨도 될 것 같고, 도전적인 사업을 진행했다는 건 젊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니 30대 쯤 될 것 같다. 성과가 있었다는 건, 기술의 숙련도가 높다는 뜻이거나 시행착오를 이미 거쳤다는 뜻일테니 30대 치고도 중, 후반 정도쯤 되지 않을까? '공대' '기술' 등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니까, 30대 중반의 남자 사람 공대 졸업자 정도로 성별, 나이대를 설정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구성원 중 여성이 많거나, 대표님이 여성이거나, 부드러운 기업문화가 두드러진다면 여성적인 톤을 선택하면 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자체로 희소성있는 캐릭터 (음.. 공대 아름이 같은?)를 구축할 수 있을 거다. 선입견이라기보다 F기업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남성으로 설정한 것뿐.
여기에 성격적인 특징도 덧입혀 볼 수 있다.
기술을 상업화하기 위해서, 혹은 기술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영 지식도 필요할테니 공대를 졸업하고 경영대학원을 나왔을 것 같다. 공대에서 기술만 연마했다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체크무늬 셔츠 입고 뿔테 안경을 쓴, 실험실에 매인 공대생이겠으나 경영대학원을 거치며 사교성이 향상되고 네트워킹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유들유들해졌을 것으로 생각해보자. 게다가 자본금을 투자 받는 과정에서 수없이 진행했던 프리젠테이션 경험과 사업적 성취, 이제 곧 성과가 구체화될 것 같다면 '자신만만'하지 않기가 어렵다.
그러면 우리의 캐릭터는 대략 30대 중반의 남성으로서 공학적 백그라운드를 가진 세련되고(경영대학원을 통한 스킬업이 이런 방향일지는 모르겠으나... ) 자신만만한 사람일 것이다- 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세련되고 유들유들한 공학도라니 이쪽도 흔하지는 않을 듯.)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말할까? 길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 글은 단문으로 짧게 짧게 가야한다. 문장을 단순하게 쓰면 자신감도 전할 수 있고, 속도감도 높아진다. '오빠 믿고 따라와~' 같은 스타일이라면 하고 싶은 이야기 먼저, 부연 설명은 나중에 하거나 아예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술 배경이 있으니 전문용어를 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투자자를 대해봤으니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활용할 것이다.
최근엔 드문 일이지만 이 프로젝트에는 갑을병정 중 '정'으로 참여한 터라, 직접 미팅을 못해서 실제로 기업 캐릭터가 이런지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일단 기획과 메시지에 적용해서 작업은 했다. )
'에이, 뭐야- 열심히 읽었는데!'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실제로 기업 캐릭터를 확인할 수 있었던 사례도 하나 들어보자.
G기업은 1차 산업 B2B 기업이었다. 소비재가 아니다보니 G기업의 사업분야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나 마찬가지여서 스터디를 몹시 많이 해야했다. 기업에 계신 분들과 형식을 갖춘 인터뷰도 여러 번 진행했고, 담당 부장님으로부터는 원포인트 속성 강의(?)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찾은 것은 우선 구성원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이었고, 산업의 속성 자체가 거대 장치산업, 1차 산업이라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성별은 남성. 또다른 특징은 구성원들의 많은 수가 관련 전공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었다. G기업이 속한 분야의 관련 전공자들은 경영학이나 경제학, 컴퓨터 공학 같은 흔한(?) 분야가 아니라는 점도 눈에 띄었다. 센터장, 본부장 직급에 계신 분들은 거의 박사님들이었을 정도이니 '고학력 전문가 집단'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성격적인 특성, 그러니까 이 기업이 가지고 있는 사내 문화나 구성원들의 태도 등도 살폈다.
'고학력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면 대개 안경을 치켜올리며 현학적인 말을 하거나,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기업의 구성원들은 '고학력 전문가'답지 않게 몹시 수더분하고 유쾌한 인상을 주었다. 자신들의 전문분야에 대한 자부심과 고객에게 진짜 도움이 되고자 하는 진심도 느껴졌다.
G기업이 속한 산업군은 언제나 항상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는 분야였고, 외부의 여러가지 컨트롤할 수 없는 요소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 산업군에서 오랫동안 꾸준하게 운영되어 왔다는 점에서 내가 찾아낸 성향 키워드는 '뚝심'이었다. 어지간한 어려움은 극복해내고 반복된 실패를 딛고 결국은 목표한 성과를 이루어내고야 마는 뚝심.
이런 캐릭터라면 말을 많이 하지는 않으면서 한 마디, 한 문장에도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할 것 같다. 전문가다운 면을 보이려면 '~ 할 것 같다. ~일 수 있다.' 는 등의 추측성 표현을 쓰지 않아야 하고, 팩트에 기반한 압축적인 단어로 꾹꾹 눌러담은 메시지가 맞는 방향이라고 판단했다.
일관된 메시지의 톤 앤 매너로 캐릭터를 확보한 곳을 꼽으라면, 단연 애플이다.
이들의 캐릭터는 특히나 제품 소개 페이지의 헤드카피에서 잘 드러나는데, 반복을 통해 리듬감을 살리고 운을 맞추며, 중의적인 표현을 즐겨 적용한다. 그리고 마침표. 문장 부호인 마침표가 카피라이팅에도 힘을 주고, 디자인 요소로도 작용한다.
이를 통해 구축되는 캐릭터는 '위트있는 세련된 자신감'이다. (물론 이런 캐릭터가 글만 가지고 구축되는 건 아니고, 디자인을 비롯한 각종 요소들이 다 작동하는 거지만.) 전반적인 표현들은 '말하듯' 하고, 문장의 길이도 길지 않아서 내용을 따라가기에 어려움이 없다. 애플의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던 선배로부터 메시지 작성 가이드라인이 꽤나 촘촘하고 구체적이라고 들었다.
내가 실제로 본 메시지 작성 가이드라인은 LG유플러스 거였다. 2017년부터 '고객 언어 혁신' 활동으로 고객들에게 보다 쉽고 직관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용어와 명칭을 개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을 담은 결과물이 책 형태로 제작되었다.
보통 영문 약어로 쓰이는 통신용어는 어렵고 난해한데 (그 와중에 매뉴얼을 엔지니어가 쓰면 극악한 수준이 된다.) 이를 쉽게 우리말로 바꾸고, 습관적으로 쓰이는 외래어나 어색한 표현들을 고치는 것이 주요 방향이었다. 이런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LG유플러스에서 제작하는 각종 인쇄물, 웹사이트 카피, C/S 응대 매뉴얼 등을 개선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최근에 커뮤니케이션 톤 앤 매너로 눈에 띄는 곳은 토스. (회사 소개의 톤 앤 매너는 좀 다르다.)
'~~요.'로 끝나는 문장으로 말하는 듯한 워딩이 중심이 된다. 해야하는 이야기를 앞에 짧은 문장으로 두고, 부연 설명은 뒤에 하는데 문장을 짧게 쓴다. (말하듯 하려면 문장이 길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유행어나 축약어 없이 담담하게 단어들을 사용하는 점이 좋다. 토스뿐 아니라 다른 기업, 서비스의 공식 채널들은 대부분 그렇기는 한데 다른 곳들은 좀 무거운 느낌이 드는 데 반해 토스는 어느 정도 가뿐함을 유지하는 느낌이 든다. 기분 탓인가?
회사 전체의 구성원들이 같은 가이드라인을 들고 있다 해도 모든 결과물의 톤이 각잡혀 딱딱 맞게 나오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통일성있는 메시지 톤 앤 매너에 가까이 갈 수 있다. 특히나 홍보, 마케팅 분야에서는 다양한 층위에서 여러 대행사나 프로덕션이 함께 일한다. 만약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각각의 대행사나 프로덕션은 알아서 해석한 톤 앤 매너의 메시지들을 가지고 올 것이다. 그러면 조금 과장해서 1000개 정도의 인격이 있는 캐릭터처럼 메시지를 내게 되는 거다.
기업의 캐릭터는 서서히 자연스럽게 구축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잠깐 멈춰서 캐릭터를 점검하고 형태를 만들어서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한다면 브랜드 인지에는 훨씬 효과적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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