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태어나서 거의 처음이지 싶은데, 뒤늦게 '덕질'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명의 배우에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로맨스 드라마라는 장르 전체를 파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무한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알고리즘이 이래서 무서운가 봅니다.)
계속해서 몇 편의 로맨스 드라마를 보다 보니 자연스레 '아, 이 지점부터는 본격적인 꽁냥꽁냥이 시작되는군' '이제 오해와 갈등이 생길 때가 되었는데? 빨리 지나갔으면... ' 하며 드라마의 구조를 파악하게 되더라고요. 말하자면 로맨스 드라마의 서사구조를 파악하게 되었달까요.
이야기의 원형, 서사구조라는 게 사실 복잡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든거죠.
로맨스 드라마도 마찬가지인데, 이야기의 발단에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인지하고 호감을 느끼며 설레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웃집 웬수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결국 남녀 주인공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잖아요?)
갈등은 여러 요소일 수 있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방해를 받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결국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난관을 극복하고 남녀주인공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나게 되죠.
그러다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자미라 엘 우아실 외, 원더박스, 2023)>에서 이야기의 원형에 관한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나올 내용들은 이 책을 참고했어요.
<제5도살장>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은 신박하게도 사랑받는 이야기의 원형을 그래프로 설명했습니다. 가로축은 이야기의 흐름에 따른 순서, 세로축은 주인공의 경험 혹은 감정을 나타내는 그래프인데요. 여러 이야기 중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 그래프가 바로 로맨스 드라마를 보여주는 구조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보니것의 연구는 2016년 버몬트 대학교와 애들레이드 대학교의 정보통신 공학자 및 수학자 연구진에 의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때는 모든 이야기를 범주화하는데 인공지능을 사용했고(무려 8년 전에!) 무작위로 고른 이야기들에서 공통적인 서사 형식,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어요.
그렇다면 여러 이야기가 가진 공통적인 서사구조를 기업 스토리텔링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많고 많은 이야기를 연구한 끝에 연구진이 발견한 전형적인 서사형식은 6가지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중에는 기업 스토리텔링에 적용하기 어려운 서사가 있어서요. 이런 서사형식을 빼면 기업 스토리텔리에 적용했을 때 유효한 구조는 세 가지 정도가 남습니다.
1. 가난뱅이에서 백만장자로 Rags to Riches
'가난뱅이에서 백만장자로'는 주인공이 감정적으로나 여러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해 커다란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입니다.
2. 백만장자에서 가난뱅이로 Riches to Rags
'백만장자에서 가난뱅이로'는 그 반대죠. 그러니까 실패 혹은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라 기업 스토리텔링에는 맞지 않고요. 고객님도 이런 이야기는 싫어합니다.
3. 구덩이에 빠진 사람 Man in Hole
'구덩이에 빠진 사람'은 기업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실패를 극복하는 내용입니다. 드라마로 생각해보면 음모와 어려움이라는 구덩이에 빠진 주인공이 탈출하는 스토리로, 책에서는 대부분의 범죄물이나 탈출 스토리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어요.
4. 이카로스 Icarus
'이카로스'는 '구덩이에 빠진 남자'와 정반대로 주인공이 상승한 후에 가혹하게 추락하는 스토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원형도 기업 스토리텔링에는 적합하지 않죠.
5. 신데렐라 Cinderella
'신데렐라'는 우여곡절이 많은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상승하다가 이야기가 본격화되면 하강, 그리고 다시 상승해서 우뚝 서는 구조이니 흡사 롤러코스터 같은 그래프인데, 책에서는 영웅 서사 모형과 가장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6. 오이디푸스
마지막으로 '오이디푸스'는 신데렐라와 반대 구조에 있는 서사인데요. 등장인물이 초반에 강한 타격을 겪고 좀 좋아지나 싶다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역시나 기업 스토리텔링 구조로는 탈락이죠.
결과적으로 기업 서사에 적용하기 좋은 구조는 세 가지 정도인데요. "우리는 이런 구조가 되어야지!" 라고 해서 그렇게 된다기 보다는 기업의 이야기를, 혹은 특정 프로젝트의 사례를 큰 그림으로 파악할 때 도움이 된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구조가 모두 위기 혹은 문제를 '극복'하고 '변화'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우리 회사가, 우리 팀이 혹은 내가 겪은 위기는 어떤 거였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관해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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